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드 왕조 (문단 편집) == 전성기 ([[아흐마드 알 만수르]]) == [[파일:모로코 궁전.jpg|width=700]] 엘 바디 궁전 한편 전투 직후 술탄 압둘 말리크 역시 부상 혹은 독살로 사망하며 동생 아흐마드 알 만수르가 계승하였다. 그는 포르투갈 포로들을 몸값으로 막대한 수익을 얻었고, 이를 통해 순도 높은 금화를 발행하여 앗 다하비 (황금왕)라는 별명도 얻었다. 아흐마드 역시 형과 마찬가지로 군대를 오스만 식으로 개편하였고, 특히 포병 양성에 주력하였다. 동시에 안달루스, 유럽인들에게 지휘권을 주고 근위대로 삼아 오스만 영향력을 견제하였다. 강화된 군대를 통해 그는 중앙 집권을 이룩할 수 있었고, 이러한 군대의 유지를 위해 높은 세금을 부과하여 페스 성직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다만 선지자의 후손인 그의 정통성에 맞서지는 못하였다. 군대 외에도 아흐마드는 문학과 음악 등 각종 학문과 종교적 행사들을 후원하였다. 또한 마라케쉬의 카스바에 호화스러운 엘 바디 궁전을 건설하였다. 다행히 대유럽 설탕, 비단, 구리, 가죽 직물 수출이 호항기였기에 그의 사치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한편 아흐마드는 형 압둘 말리크보다 더 노골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나려 노력하였다. 1579년과 1581년 그는 스페인 사절을 접견하였고, 후자의 경우 사절이 보는 앞에서 오스만 제국의 상징을 밟기도 하였다. 주화와 금요 예배에서도 무라트 3세 대신 아흐마드만이 언급되었다. 이에 무라트 3세가 침공을 준비하자 아흐마드는 코스탄티니예에 많은 공물을 바쳐 이를 무산시켰고, 매년 보호세로 금화 10만닢을 납부하고 오스만 술탄에 예를 갖추는 조건으로 모로코 해안과 선박에 대한 알제리 해적들의 공격에서 벗어났다. (1582년) 이듬해 양국은 스페인령 오랑에 대한 공동 작전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다만 오스만 제국을 존중하면서도 아흐마드는 유럽 세력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전쟁을 선동하고 자신이 무슬림 세계의 지도자임을 피력하는 주장을 퍼뜨려 종교적 권위에도 맞섰다. 1587년 모로코에 강경 노선을 유지하던 알제 총독 울루츠가 사망하자 아흐마드는 오스만 조에 대한 연공을 중단한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이란의 [[사파비 제국]]과의 전쟁에 매진하느라 마그레브에 신경쓰지 못하였다. 한편 스페인과 친선을 유지하던 그는 1580년 대스페인 동맹을 모색하려 사절을 보낸 잉글랜드와 더 깊은 친교를 맺었다. 본래 (포르투갈의 반발에도) 영국산 직물 & 무기와 모로코산 설탕 & 질산칼륨(초석, 염초)을 교환하는 무역에 기반하던 양국의 관계는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병합한 후 더욱 강화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모로코에 선박용 목재 판매를 허가하고 1585년 아흐마드의 무역 특권 (카피툴레이션) 승인과 함께 바르바리 회사를 설립하였다. 영국과의 밀착을 숨기고 스페인과의 관계도 유지하던 아흐마드는 1595년 북부에서 발생한 조카 앗 나시르의 반란을 스페인이 도운 것에 분노, 1600년 비서 압델 와히드 벤 마수드를 엘리자베스에게 파견하여 스페인 침공을 논의하게 하였다. 동봉시킨 친서에는 스페인 본토에 대한 침공이 어렵다면 신대륙의 스페인 식민지를 침공해 분할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다만 양국의 국력이 스페인에 미치지 못하고 기독교권의 엄청난 반발을 예상한 엘리자베스는 군사 작전은 거부한다. 다만 양국의 무역은 더욱 활성화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